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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8x은 2020년 다음과 같은 활동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2020년 내 활동할 특정 계획들에 대한 참여 및 협조

- project8x는 기획을 바탕으로 한 프로젝트는 물론, 크게는 다양한 팀 위주의 사업을 목표로 지향하고 있습니다. 2019년에는 18년도 같이 진행했던 팀원으로 파견사업 기획 부분 및 서울시 사업 등에 참여하였고, 참여한 인원들에게 일부 지원금 및 활동에 대한 보상을 진행하기도 하였습니다.

 

- project8x는 참여인원에 대하여 특정 예술작업을 하는 O작가가 아닌, 관련된 예술적 기량과 능력이 있는 O인력으로 생각을 하려 합니다. 그것은 한 개인의 독창성을 무시하거나 인정하지 않기보다, 다시 앞서 표현한 예술적 기량이 있는 팀이 함께 하여 높은 퀄리티와 사업적 성과, 피드백 되는 보상들을 만들어 가기 위함입니다.

- project8x를 통해 제가 약속드릴 수 있는 것은 추상적이나마 특정 발표 등의 결과 지향적인 활동과 그 과정에서의 성과 및 성취감, 인프라 및 별도 사업으로 확장시 보상입니다.

- 2020년 몇 개의 프로그램들을 염두하고 있습니다. 영어회화 프로그램이 실행되면 1월부터 당장 활동에 들어가고자 합니다.

- 전반적인 테마는 2018년 <나의 피지배적인 역사>에서 세대론, 2019년 <두꺼비도시주거연구단>에서 주거에 대한 고민으로 연결되어 환경적 요인에서 소유에 대한 고민의 기점을 다뤄볼까 합니다. 이 부분은 조정될 수 있습니다.

- 다만 전반적으로 확정되지 못한 부분이 많습니다. 기획 과정에 디테일한 부분은 확정 사항에 따라 달라질 여지가 많습니다.

- 프로젝트 전반적인 과정에서 선택적 참여가 어려움을 말씀드립니다. 이미 몇몇 분들께는 말씀 드렸지만, 제 기획은 대체로 제 기회비용을 소모해서 준비하는 만큼 다소 쉽지 않은 과정들을 통해 진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일부 과정들은 팀 내 친목적인 자리에서도 즉흥적으로 진행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고로 선택적이거나 낮은 참여율은 팀의 입장에서나 기획자인 저에게 사기 저하로 작용되는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2018, 2019 프로젝트에 참여하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프로젝트가 실행되는 시기는 다소 자주 모임 등을 가지는 편이니 유의 바랍니다.

무엇이 창작을 영위하게끔 하는가? 이런 질문에서 시작해봅니다. _1912 초안

저는 올해 두산아트센터에서 ‘노인과 바다’라는 판소리 극을 본 적이 있는데, 프로그램의 취지와 취향을 떠나 젊은 판소리 꾼의 많은 고민을 충분히 느끼는 극이었습니다. 단순히 판소리 내용 자체가 대단하다는 것이 아니라, 공연(공개)하는 과정에서 판소리와 소리꾼의 역할 자체를 많이 고심한 것이 느껴졌습니다. 과거 소리꾼이 관객과 관계를 맺는 방법을 관객 스스로 유추해보게끔 퍼포먼스를, 극의 농밀도도 농밀도이지만 소리꾼이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중계자 역할을 맡았음을 현대적 시각에서 재해석 해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분명 전통 계승을 넘어 현대와 맞닿는 지점에서 자생하기 위한 노력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무엇이 창작을 영위하게끔 하는가? 이런 질문을 다시 생각해보면 기본적으로 창작을 하고 싶은 이가 일종의 축적과정을 가지고, 결과를 불특정 다수와 공유를 하는 과정 그 자체는 변치 않겠지만 현대 문화예술, 특히 시각예술 분야에서 이런 전통적 방식이 얼마큼 통용이 될 수 있을 것인지 생각을 해봅니다.

그것은 전통적 예술가로서의 자세가 문제라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의 발전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가 흔히 작품이라 부를 수 있는 캔버스 한 폭의 그림이 문제라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쉽게 마주치는 것들, 하다못해 의도치 않게 보는 유튜브 광고 하나마저 너무나도 화려하고 재미있으며 하루에도 수백 수천건씩 쏟아져 나온다는 것이 문제일 것입니다. 그것이 예술적 가치가 없냐고 묻는다면 그것 또한 아닐 것입니다. 당연하게도 인간의 감각과 호감도는 한도가 있을 것이고, 이런 미디어 홍수의 시대에서 그 주기는 점점 짧아져 감을 느낍니다. 수없이 터져 나오는 블록버스터 미디어들에 익숙해지다 보면, 저는 문화예술 창작가라는 개인의 아이덴티티에 회의감이 들기도 합니다.

다시, 지금의 시각예술 자체는 전통적 활동 영역에서 그리 많이 벗어나 있지 않다고 봅니다. 대체로 즉흥적 피드백이 가능한 커뮤니티를 추구하기보다보다 한 개인이 연구와 축적의 시간 후 공개의 형식을 취하는 시각예술의 특성상 어쩔 수 없이 동시대성에서 한발 뒤쳐지게 됩니다. 대중의 기호에는 분명 한도가 있을 것이고 불가피하게 모든 미디어는 그 호감의 취득 과정에서 크고 작은 경쟁을 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앞서 말한 데로 다소 늦은 시간성을 가진 시각예술은, 대체로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한 결론 혹은 후일담의 형식으로 진행되는 경향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예술이 마찬가지겠지만, 시각예술이야말로 시간성을 따라잡거나 뛰어넘으려는 시도들이 유난히 관심을 받고 인정을 받는 경향을 갖게 된 것이라 생각해봅니다.(일예로 현대미술에 대한 대중과 평단의 괴리감이라던가) 이것은 무척 자연스러운 현상이기에 근현대들어 수많은 이들이 작품보다 본인이 더 앞에 등장하려 노력한 것은 그 대안 중 하나일 것입니다. 우리가 익히 알 법한 유명인사들이 그러할 것이고 이제는 이것마저 전통적으로 계승되어 오고 있습니다. 마치 투자를 받는 것과 비슷합니다. 먼저 브랜드를 앞세우고 그 브랜드에 뒤따르는 관심과 신용으로 후속적으로 나올 창작물에 유예기간을 주는 것이죠.

저 또한 시각예술 분야에 늘 관심을 가지고 또 고민을 하는 입장에서, 현재 빛의 속도로 부풀어 나가는 미디어의 시대에 내 창작의 방향성이 어떤 위치에 있을 것인가 자주 생각 합니다. 이런 큰 대의명분이 아닌 당장 활동 문제의 경우에도, 앞서 말한 데로 문화예술의 한정된 수요(몰아닥치는 미디어와 짧아지는 호감 한도)에서 당장 유튜브 문화 등을 봐도 이것을 넘어설 무엇인가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제는 오히려 지금 시대 시각예술이 가지는 경쟁력이 있다면 일종의 분별이라고 해야 할까요. 효과적으로 뛰어나거나 앞서 있는 무엇이 아니라, 오히려 밀려나고 특정 소수의 관심으로 좁혀져 보존가치로 인정받아야 할 그런 문화로 처우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시각예술과 관련된 관심사를 가진다는 것은 유니크한 애완동물을 키운다던가, 우표나 엽서를 수집하는 행위와 이제는 뭐가 다를지 생각해봅니다.

 

본론으로 들어가, 저는 크게 두가지 관점으로 현대 시각예술 분야 내 창작의 방향성을 상정해보았습니다. 앞서 말한데로 현대까지의 시각예술 분야에서 동시대성의 경쟁력과 대중의 인지, 다시 사회적으로 시각예술과 그 창작가가 인지되는 방식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요 몇 년 저는 ‘전시가 하기 쉬워졌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는 전시공간과 지원의 확충도 있겠지만 한편으로 창작가가 작품을 누적시키고 공개하는 프로세스가 비교적 빨라졌다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수치적으로 근래 작가라 함은 단체전과 개인전을 포함하여 한 해에도 다수의 전시를 참여하는 경향이 있는데,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항상 후속적인 위치에 있었던 시각예술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빠른 속도로 이미지들이 소비되거나 반복되는 것이라 생각해봅니다. 현대 많은 이들이(창작가와 관객을 포함하여) 빠른 주기로 이미지를 소비하고 다음 플랫폼을 찾아 나서는 일은 단순히 이들의 성격이 급해서가 아닌, 미디어의 홍수 시대에서 그 속도감을 따라잡기 위한 당연한 변화라고 봅니다. 이것을 위한 생태계가 조성되었기에 전시를 하기 쉬워진 것이 아닐까.

따라서 미디어의 속도감을 의식하면 자연스럽게 창작의 유예기간에 대한 정당성을 고민하게 됩니다. 왜냐면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자연스러운 흐름이기 때문에 더욱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한번 시간적 간극을 넘어 아티스트로서 독창적인 가치와 영역을 부여하는 것에 대해 다각도로 고민해보며, 저는 이에 대한 대처로 이야기의 수집과 누적의 과정을 객관적인 차원으로 접근하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은 정말 기본적인 것입니다. 데이터를 쌓아 올리며 그것을 언제든 가시화 할 수 있도록 가능성을 두는 것은, 우리가 흔하게 창작을 하는 프로세스의 지점을 조금 더 명확하게 표현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때 이야기와 창작은 일종의 변별력을 가지게 되는데 쉽게 말하여 이성적 인지와 감성적 표출이라 표현을 해봅니다. 이성적 인지의 과정은 다소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모든 이들이 객관성을 부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앞서 이야기 한데로 시각예술의 전반적 한계인 현상에 대한 후속적 입장 그 자체에 솔직해지자는 것입니다. 

다시 후자, 시각예술가의 창작으로써 그 존재의 목표점은 사실 창작 그 자체를 포함해 다 다를 것이고 당연히 대중의 인지도 마찬가지겠지만, 전자인 이성적 인지의 데이터는 어느 영역을 막론하고 지속 가능하며 통용될 수 있는 자원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예술가라는 아이덴티티가 사회적 내부에서도 통용되는 한 지점에 대한 이야기일 수 있는데, 창작 행위 그 자체에 필연성을 부여하는 방법이 바로 객관성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 객관성에 부합되는 것은 바로 제일 기본적인 데이터 작업이라는게, 새로울 것도 아닌 당연한 사실일 것입니다.

이어서 방금 말한 사회적 내부에서 예술가라는 아이덴티티가 통용되는 것에 대한 고민이 바로 플랫폼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 또한 어쩌면 너무 쉬운 이야기인데 하나의 사례를 들자면, 얼마전 누군가와 술한잔을 할 때에 창작과정을 사업화 하는 것에 대한 반감을 듣게 되었습니다. 결국 창작을 근본적으로 “좋아서 하면 되는 것이고 싫으면 안해도 되는 것”으로 전제가 나오고 그 다음 그런 사업화에 대한 것에 맞춰 억지로 창작을 하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뭐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의 경우에도 이런 것을 학교에서 배우거나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좋아서 하는 것이 예술”이라면 반대로, 그 좋아서 하는 일을 왜 전시로 만들고, 왜 작가라는 아이덴티티로 활동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어봅니다. “좋아서 하는 것은 ‘예술’이 아닌 ‘창작’”이라는 것은 의외로 많은 이들이 착각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술이라는 것이 우리가 행위에 대한 결론을 포함해, 어떤 용도와 목적을 가지고 활용하고자 할 때 분명히 특정 문화권과 시스템 내에서 인지되어야만 합니다. 양자역학의 한 농담처럼 누군가 주시하고 인지(그리고 인정) 하고 있어야만 내가 하는 행위가 자위 행위인지 예술 행위인지 분리가 가능한 것이며, 반대로 자위 행위와 예술 행위가 분리되기 위해서는 창작가 이외에 불특정 1인 이상의 시스템이 존재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고로 저는 다시한번 기본으로 돌아가, 기존의 시각예술 창작의 근원과 현대 미디어의 홍수 시대에서 그것을 다루거나 발휘하는 플랫폼에 대한 고민과 고찰이 필요했고, 또 그것이 전반적으로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저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은 이미 다층적인 플랫폼 안에 들어와 있고 그것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학습되어 있으며 긴 역사적 배경을 토대로 우리가 발딛고 있는 모든 시스템에는 느리거나 빠르게 그런 고민에 대한 피드백이 진행되어 오고 있습니다. 앞서 전시가 하기 쉬워졌다는 표현도 한 사례일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저는 현대 시대에서 시각예술 분야의 창작행위와 그 표현, 전반적인 운영의 방식에서 일종의 정당성 및 예술적 입지를 획득하기 위한 과정으로, 실제 행위의 방향성과 환경적인 요인에서 찾고자 하고 있으며 현재 project8x등을 통해 연구해보고자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창작의 옳고 그름, 혹은 더 낫고 덜함에 대한 논지를 넘어 시각예술이 동시대 다양한 미디어들의 폭발적인 수요 공급에 대해 얼만큼 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을지, 나아가 그 안에서 내 행위와 고민들이 분야에 대한 개선책 연구와, 실제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의 범위에 얼만큼 영향을 미칠지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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